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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온태
2019.09.21 09:39:40
쓰다보니 단상이 단상이 아니게 된 글


1. 많은 분들이 경기의 패인으로 중원의 열세를 지적하시는데, 개인적으로 그 원인은 미들에 배치된 선수들의 기량보다도 사이드 경쟁력과 팀 간격조정의 허접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 투헬은 양쪽의 사이드유닛을 활용해 경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양쪽 윙이 하프스페이스에 붙어 사이드라인쪽 공간을 열고 풀백들을 높이 전진시켜 그 공간을 활용했죠. 이 팀은 이미 이런 운영을 하는 상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리가 개막전이었던 셀타 원정이 이런 양상이었죠. 당시 양 윙으로 나온 비니시우스와 베일은 수비 시 상대 풀백을 집중력 있게 마크하면서도 역습 시 빠른 주력을 살려 상대의 측면 뒷공간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며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3. 이 경기 선발로 출장한 아자르와 베일은 당시의 호평을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아자르는 뫼니에를 번번히 놓쳤고, 베일은 베르나트를 쫓아다니긴 했지만 영향력을 제어하는 데엔 실패했습니다. 자연히 팀의 라인은 내려앉게 되고 전환은 느려집니다. 템포는 쳐지고 패스 루트도 척박해지죠.

4. 사이드에서의 경쟁력을 잃어버리자 지공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상대의 수비 전환은 늘 팀의 공격 전환보다 빨랐으며, 측면으로 나가는 패스 루트를 미리 차단했습니다. 팀의 지공 시 플랜은 하메스를 전진시켜 4-3-3에서 4-2-3-1로 전환해 상대 3선을 공략하는 것이었는데, 상술한 이유 때문에 패스 루트가 척박해지자 하메스는 마르키뉴스는 커녕 베라티에게서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했죠.

5. 한편, 위에서 비교한 셀타와 파리 간에는 한가지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4-4-2로 임한 셀타와 달리 4-3-3을 운용한 파리는 두 메짤라를 측면 유닛에 가담시킬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베라티와 게예는 각자의 사이드에서 풀백과 윙간 연결고리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수비하는 과정에서 팀의 미들 블록에 또 문제가 드러납니다. 전진 임무를 받은 하메스는 발이 느린 탓에 종종 수비 블록 합류가 늦어 베라티를 제 타이밍에 압박하지 못했고, 크로스는 게예의 저돌적인 전진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미들 저지선 간 간격은 엉망이 되었으며 측면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카세미루는 중과부적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이번 경기를 통해 크로스에 대한 비판이 눈에 많이 띄는데, 저는 '애초에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한 요구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령관으로서의 크로스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인데, 패스 플레이는 주는 것만큼이나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크로스는 명실상부 현 시점에서 패스를 가장 잘 주는 선수이며, 팀도 그간 크로스의 이 능력 덕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기에서의 팀은 패스를 잘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크로스의 주 활동영역인 왼쪽에 선 두 선수는 호흡도 동선도 모두 엉망이었고, 미들 파트너인 하메스는 현 미들 구성에서 패스를 가장 잘 받는 선수지만 팀도 선수 본인도 너무 느려서 좋은 위치를 선점할 수 없었으며, 평소와 달리 라모스도 없었기에 크로스는 기초 빌드업을 돕기 위해 더 아래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선 크로스가 아니라 크로스 할아버지래도 제대로 패스를 보낼 수 없어요. 그렇다고 크로스에게 모드리치처럼 압박을 벗겨내고 볼을 직접 전진시키라는 요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7. 그러나, 그럼에도 이 경기 크로스의 종합적인 평가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는 처참한 수비 퍼포먼스에 있습니다. 제대로 된 블록으로 전혀 기능하지 못했어요. 앞서 언급한 대로 게예에게 고전했으며, 특히 사이드 커버에서 미숙함을 많이 드러냈습니다. 때때로 측면 공간으로 치고나가던 게예를 크로스가 제대로 쫓지 못했기 때문에 멘디가 고생을 많이 했죠. 상대는 세명이 스위칭하며 공격을 들어오는데 꿔다놓은 보릿자루 둘과 수비해야 했던 멘디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8. 지단은 경기 후 선수들의 열의가 부족해서 화가 났다던데, 본인의 경기 준비는 제대로 되돌아본건지 궁금하네요. 저는 암만 봐도 파리를 너무 얕본 게 아닌가 싶거든요. 결과론적인 얘기처럼 보일 지 몰라도 저는 아자르 대신 바스케스를 선발로 냈으면 했었어요. 원정이라 비겨도 크게 나쁜 결과는 아니고, 앞쪽에선 답답해도 상대 측면 유닛을 방해하고 동료들의 커버 범위를 줄여주는 데엔 가장 적합한 선수니까요. 전반을 안정적으로 가져가고 후반에 지친 상대에게 아자르를 투입하여 이득을 챙기는, 지단이 토너먼트에서 잘 써먹던 운영을 기대했는데 현실은 반대였고 내내 답답한 양상이 지속되었죠. 후반 운영도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메스를 완전한 10번으로 옮기고 베일을 포워드 라인으로 당겨 공격진 간 거리를 좁히며 전반엔 비교적 후방에 남아있던 카세미루와 카르바할을 전진시켜 이들의 공간을 메우도록 했는데, 결과는 크로스의 고립만 심화되고 지단 체제 내내 반복되는 허접한 전방압박때문에 뒤만 더 털렸습니다. xG상으로도 전반엔 0.30-0.33의, 정말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할 경우 디마리아의 결정력 덕에 스코어 차이가 벌어졌다는 정신승리가 가능한 수준에서, 경기 종료 시점 1.64-0.69로 벌어집니다. 전술변화로 전반과 다를 바 없는 찬스를 만드는 동안 상대는 1.34골만큼의 찬스를 더 만들었단 얘기죠. 전반에 안되던 부분을 정확히 수정하고 나와 경기를 뒤집던 그간 지단의 면모와 상당히 배치되는 모습입니다.

9. 팀에 없는 요소들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 지단 입장에서 아쉬웠을 법한 카드는 이스코와 마르셀루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동력을 업그레이드시킬 선수들은 아니지만 개인의 온볼 역량으로 상대의 수비 블록을 헤집고 팀의 숨구멍을 만들 줄 아는 선수들이니까요. 특히 이스코가 아쉽습니다. 어차피 팀의 본래 템포대로 운영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고 여차하면 수비라인 앞까지 내려와 볼을 받고 전진할 수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좋은 모습을 기대해볼 만 하다고 봤거든요. 이미 베라티를 우주관광보낸 경험도 있기도 하고요.

10. 하고 싶은 얘기 까고 싶은 선수가 아직 많은데 글이 너무 기네요. 장문충 에반데; 상당히 암울한 패배였지만, 그래도 좋은 팀이 될 잠재력은 여전히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호흡 문제에서 기인하는 미스가 많았고 몇몇 선수들이 많이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요. 이적생들도 아직은 적응이 덜 됐기도 하고요. 지단의 과제는 이 패배를 발판으로 팀을 빠르게 본궤도에 올려놓는 것일텐데, 앞으로의 일정이 그리 쉽진 않네요. 부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이런 패배는 너무 보기가 힘들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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